버닝 감상
리뷰

버닝 감상

2018. 5. 22. 17:46

영화 버닝을 봤다. 사실 보기 전에는 그저그런 예술영화라고 생각했는데 평론가들이 극찬하고 리뷰어들도 극찬하고 언론도 극찬하니 너무 궁금해졌다. 게다가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고 한다.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의 영화화라니...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은 볼 때마다 머리속으로 영화를 보듯 장면을 상상하면서 봤었다. 이번 영화의 원작인 '헛간을 태우다'는 못 본 소설이지만 지금까지 본 그의 작품은 모두 어둡고 기괴했고, 직설적이지만 상상할 여지가 많았다. 첫작품을 너무 SF적인(? 아니면 영적인) 것(1Q84)을 봐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약간 현실을 벗어난 느낌이었다.

보기 전부터 이런저런 기대와 리뷰어들의 극찬을 가득 품었지만 어쩐 일인지 영화를 보면서는 머리 속에 무라카미 하루키도 평론가, 리뷰어들이 했던 말들도 모두 사라져 있었다. 영화는 꽤나 긴 롱테이크들이 계속해서 나온다. 3인칭 시점에서의 롱테이크는 그렇지 않은데 2인칭 시점의 롱테이크는 많이 불편하다. 그 장면들이 날 압박하는 느낌이 들었다.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이 그 장면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

초반에 그렇게 압박을 당해서 그런지 영화에 내내 끌려다니다가 마지막 장면이 되어서야 정신을 차렸다. 많이 불편했지만 그 불편은 진행이 좋지 않아서도 아니었고 연기가 어색해서도 아니었다. 감독이 그렇게 하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싫지는 않았다. 끝나고 나니 오히려 이 영화를 다시 보고 싶어졌다. 머리 속에 수많은 생각이 맴돌았다.

스포일러가 있는 감상

영화를 보자마자 집에 와서 저장해둔 스포일러 리뷰 두편을 봤다. 둘 다 최근에 구독하기 시작한 리뷰어들인데 나쁜 영화는 사정없이 까고 좋은 영화도 나쁜 점은 깐다. 칭찬도 사정없이 한다. 나쁜 영화도 좋은 점은 칭찬한다. 이번 영화는 어떻게 말했을지 영화를 먼저 본 후에 듣고 싶었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 나서는 그런 생각은 접어두고서 영화의 해석이 필요했다.

역시나 단정적으로 말할 수 없는 부분이 많아서 그런지 해석은 조금씩 달랐다. 하지만 영화를 좀 더 깊이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엉준은 영화의 내용을 '전부 허구일 것이다', '전부 진짜일 것이다' 두가지로 구분해서 리뷰했는데 장면 장면에 대한 해석 위주였다. 라이너는 욕망에 대한 이야기 '리틀 헝거', '그레이트 헝거'를 통해서 영화 전체를 바라보는 시각으로 해석했다. 내게는 라이너의 해석이 좀 더 큰 도움이 되었다.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를 직접적으로 말하기도 그러지 않기도 했지만 전체를 바라보게 해주었기 때문에 말하지 않은 장면도 내 나름대로 해석을 해볼 수 있게 되었다.

또 원작인 '헛간을 태우다'도 우연히 발견해서 읽었다. 생각보다 더 짧은 내용이었다. 마치 영화의 줄거리를 쓴 듯한 느낌이 들었다. 주요 뼈대만 소설을 가져다 쓰고 나머지는 모두 새로운 것이었다. 소설은 남자와 여자, 여자의 남자. 이 셋만의 이야기가 아주 가볍게 흘러간다. 남자는 여자에게 집착까지는 하지 않는다. 영화에서 비닐하우스로 표현되었던 헛간에 약간 집착한 것만 빼면 그저 흥미 정도로 보는 것이 좋을 정도의 관심만 가진다. 여자가 사라졌지만 그저 없어졌구나 하고 끝난다.

사실 나는 벤이 혜미를 죽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영화 끝무렵에서야 했다. 영화에서 그렇게 메타포 메타포 했는데 비닐하우스가 메타포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마치 종수가 비닐하우스를 찾아헤매듯 나도 종수처럼 비닐하우스만 생각했다. 아마 소설을 먼저 봤다면 헛간과 여자를 연결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난 종수만큼 바보같았다.

영화는 소설보다 훨씬 풍성하다. 이야기를 몇갈래 더 만들었지만 중요한 줄기를 전혀 해치지 않았다. 아주 훌륭한 연출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라이너의 평처럼 근래에 보기 힘들었던 훌륭한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 이창동 감독이 이 영화는 윌리엄 포크너의 소설 'Barn Burning' (헛간을 태우다) 도 가져왔다고 한다. 아버지의 분노가 아들의 분노로 이어지는 부분이 그렇다고 한다. 그 소설도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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