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여휴가 사용계획
1년의 하반기에 들어서면 회사에서 남은 휴가에 대한 계획을 제출하라고 한다. 이전에는 종이에 일일이 써서 제출하라더니 올해부터는 시스템을 통해서 등록받고 있다. 등록 폼에는 신박한 기능이 하나 들어있는데 바로 "자동입력" 기능이다. 남은 휴가 일수에 따라 날짜를 알아서 입력해주는거다.
가만 생각해보니 처음부터 이 계획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는 것을 이 시스템이 말해주는 것 같다. "자동입력"을 하는 것은 실제로 이 날짜에 휴가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가정한 것이다. 그러니 귀찮게 날짜를 계산하지 않도록 알아서 입력해주는거다.
사실 이 시스템이 생기기 전에도 이런 잔여휴가 사용계획을 받는 것이 회사의 면피용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직원의 휴가를 보장하였으나 직원이 가지 않았다는 것을 이 계획이 증명하는 것이다. 이 증명을 통하여 회사는 남은 휴가에 대한 보상을 하지 않아도 된다.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대놓고 기능을 만드니 참 기분이 이상하다. 편한데 기분이 나쁘다.
처음엔 회사에 대해 살짝 화가 나다가 이런 면피를 할 수 있도록 한 법에, 이런 법을 만든 사람들에게 회가 난다. 무조건 보상하도록 해야하는거 아닌가? 남은 휴가 일수만큼의 일당을 받아야 하는거 아닌가? 내가 이런 계획서를 제출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회사만, 아니 이 업무를 담당하는 직원만 속이 타겠지.
휴우. 그냥 제출하고 만다. 난 저항할 용기가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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